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 나는 사람, 가끔 목소리가 듣고 싶고 가슴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 사람 바로 전·은 임 아나운서이다. 1968년 10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고고 미술사학과를 졸업(87학번) 한 뒤 1992년 7월 MBC에 입사했다. 지금도 방송 중인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행복한 책을 읽는다””샘이 굶주린 물””한국어 외출”등 여러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MBC라디오”FM영화 음악”이다. 입사 첫 해인 92년 11월 2일부터 진행을 맡았다.
“정· 연 다음”(정·은 그의 FM영화 음악)은 오전 1시부터 전파를 탔다. 전 아나운서는 고운 목소리와 차분한 진행으로 영화 정보에 굶주렸던 리스너의 지적 감성을 자극했다. 개봉작이나 명작을 소개하면서 영화 스타들에 얽힌 에피소드로 얘기했던 기존의 영화 음악 DJ와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 국내에서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영화를 자주 소개하고 청취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해박 지식은 리스너의 넋을 빼놓을 만큼 깊이가 있었다. 더구나 자신만의 주관적 해석 능력으로 감탄사를 자아냈다. 전 아나운서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 현실에도 외면하지 않았다. 민감한 사회 이슈를 언급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말했다. 강제 철거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오프닝 코멘트로 내보내고,”너를 위한 행진곡” 뱅이나 볼셰비키와 “인터내셔널”를 방송에 내보냈다. 이처럼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사회 참여적이었다. MBC업무 혁신 위원회 위원과 노동 조합 여성 부장으로 활동한 것과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많은 청취자들이 이런 정·은 임 아나운서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청년, 학생, 지식인들은 “정· 연 다음”을 듣느라 밤에도 잠을 못 잤다. 이런 경험담이 전해지면서 마니아도 생겼다. 당시 MBC는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며 파업 중이었다. 간부들은 전 아나운서가 노조에 가입하지 말도록 촉구했다. 전 아나운서는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 타협을 거부했다.
평소 방송에서 밝힌 소신을 지키다, 그 댓가는 혹독했다. “정· 연 다음”는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4월 1일에 폐지됐다. 약 2년 5개월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한 전·은 임 아나운서의 여정도 끝났다. 1995년 4월 하루 끝의 방송, 클로징.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정말 해야겠네요. 이 FM영화 음악은 제가 MBC아나운서로 입사해서 처음으로 담당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그 전에 티비를 임시로 맡은 것도 있는데 정식으로 담당한 것은 라디오 FM영화 음악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때가 1992년 11월 2일이었지만게 떨면서 첫 방송을 한 것을 생각합니다.그래서 뭔가 특별한 날 아침 해가 색다르게 느낄 때나 매우 예쁜 꽃을 보았을 때 낮 거리에서 특별한 광경을 봤을 때 책 속에서 멋진 글을 발견했을 때 그런 때 제일 먼저 생각 났던 것은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은 꼭 이 말을 해야 한다 너무 떨리고 그런 일을 생각하고 어떤 때는 마이크 앞에서 숨이 막히는 느낌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는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렇게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방송하는 사람의 최대 행복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2년 반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소중한 인연을 맺은 것 같아요. 정·은 그는 여기서 인사합니다. 우리의 영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속에서 김·창원 씨의 노래”마지막 인사”에서 내 마지막 인사에 바뀝니다. 조심하고 전 아나운서는 쫓겨나다시피 프로그램에서 내렸다. 팬을 중심으로 “정·은 임 복귀 추진 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결혼과 함께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노스 웨스턴 대학에서 석사 과정에 입학했고”한국 영화광”이란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팬의 성원에 힘입어 03년 10월 21일”정· 연 다음”은 8년 만에 부활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은 임 아나운서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약자와 소수파에 대해서 말했다. 당시 129일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김·쥬익 금속 노조 한진 중공업 지회장을 오프닝 멘트에서 추모하기도 했다. 2003년 10월 22일<고공 크레인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혼자 싸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올 가을에는 허전하다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정말 외로운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조용하게 고독한 전쟁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덜대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느낌, 이 세상에 겨우 매달린 듯한 기분에 이 하루 견딘 분들, 내 목소리 들립니까? 나는 FM영화 음악의 전·웅임입니다.과감하고 주저 없이 발언은 전 아나운서 자리를 위협했다. 결국 약 6개월 후의 04년 4월 26일 박 서현의 “All that Music”로 통폐합되어 도중 하차했다. 2004년 4월 26일 마지막 방송 오프닝. 홀로 가슴도 제대로 꺼지지 않고 우거진 연기만 내고 있는 나의 마음의 군 불아 꺼져에는 아직 멀었나? 안녕하세요.”FM영화 음악”의 전·웅임입니다. 시인이나·히 일한 씨의 “서시”에서 FM영화 음악의 문을 열었습니다. 서시. 한국어로 “( 연다 시)”입니다. 그래서 향후도 시를 쓰는 사람이 영원의 시작의 의미로 쓴 문장입니다. 항상 아이러니죠. 마지막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마지막은 시작과 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선택했다. 바로 그 기분이에요. 단지 한 마음도 따뜻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자, FM영화 음악을 듣고 있는 여러분 때문에 오늘 첫곡을 전달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레니·쿠라빗쯔,”It Ain’t Over””Til It’s Over”. 약 3개월 뒤인 7월 22일 오후 2시 40분경 정·은 임 아나운서는 자신의 쌍용 렉스턴 차량을 운전하고 방송국에 출근했다. 서울 한강 대교 남단 중앙 대학에 진입하는 흑석동 삼거리 지하철 9호선 공사 현장을 지나가는데 차가 전복하는 교통 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후 여의도 성모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머리를 크게 다친 심각한 상태였다. 오후 6시부터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료진은 “머리에 중상을 입고 두개골이 함몰한 상태다. 수술을 했지만, 큰 기대는 하기 어렵고, 살아나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결국 오후 6시 반, 뇌 부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37세였다. 전 아나운서의 쾌유를 간절히 바랐던 팬들은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장례는 MBC회사 동료 장으로 치러지며 경기 가평군 북쪽 한강 공원에서 영면했다. 유족에 남편과 아들이 하나 있다. 전 아나운서는 영화 속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짧은 굵게 샀다. 비록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영화 음악의 전설로 리스너의 가슴에 영원히 남았다. 그녀를 기억하는 팬들은 매년 기일에 추도회를 열고 있다. 생전의 별명은 ‘정부 씨’이었다.